무섭게 재밌는 책이다. 여러가지 이 글을 시작할 말을 고민했지만, 이 말이야말로 나의 느낌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을 찾지 못했다. 두 권에 달하는 볼륨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온다. 책을 한 챕터씩 읽어 나갈 때마다 다음 챕터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는지.
여러 가지 사회적 담론들을 떠올리게 하던 전편의 계급의식은 일방향적인 영웅담의 흐름 속에 잊혀지는 감이 다소 있다. 레드로서 분노하고 투쟁하였던 지난 편의 아이덴티티는 대로우의 사회적 지위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골드로 치환되어, 어느새 자연스러운 귀족들의 암투 드라마 뒤에 숨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독을 머금은 대로우의 심장은 레드의 그것이다.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레드로서의 자각과 골드로서의 투쟁은 대로우로 하여금 '모두에게 동등한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한다. 이러한 대로우의 고민은 거대한 태풍이 되어 돌아와 드라마의 내적 동력을 채운다.
지난 편이 체제와 소년소녀들의 투쟁을 그림으로써 '헝거 게임' 등의 작품들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편을 읽는 내내 내가 떠올린 서사는 '왕좌의 게임'(얼음과 불의 노래)의 그것이었다. 왕좌의 게임이 우릴 열광하게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내가 제일로 꼽는 것은 전개의 '속도'이다. 익숙한 클리셰와 연결을 위한 서사를 거부하고 수많은 캐릭터들의 목을 쳐 가면서 진행되는 전개 말이다. 이 책에는 그에 비견되는 잔혹함이 있다.
전작의 '올림포스'를 끌고 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부터 차용한 인물들의 이름은 일리아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라그나로크에 가깝다. 유사 신으로서 군림했던 골드들은 대로우를 둘러싼 음모와 전쟁 속에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쓰러져 참담하게 죽어간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골드들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인가? '라그날'으로 대표되는 하층 계급은 과연 눈을 뜰 수 있을 것인가? 틈틈이 뿌려둔 사회적 담론의 맹아들로 꼼꼼하게 빈 곳을 메꿔가며, 음모와 갈등을 연료삼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서사에서 눈을 멈추기는 정말로 어렵다.
'레드 라이징'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야말로 올 연말 가장 뜨거운 책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레드 라이징'부터 시작하는 걸 권한다. 현시대 최고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접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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