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추어들의 글을 읽는 것은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첫 문장부터 힘을 빼놓아 버리거나, 문장이 좋으면 아이디어가 식상하고, 아이디어가 반짝이면 구성이 엉성하기 마련이다. 그런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지난 졸필들을 되새겨 보는 느낌이라서 등에 식은땀이 다 난다. 장르물은 특히나 더 그렇다. 순수문학인 척 하는 것들은 폼이라도 잘 잡고 있지, 장르물은 쉽사리 구차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참 괴롭다. 그렇기에 조금 걱정은 되었지만, 항상 꽝일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복권을 사는 딱 그 마음으로 이 단편집을 읽기 시작했다. 아아, 다행이었다. 맘에 딱 든다. 무엇보다도 그 산뜻하고 담백한 느낌이 좋다. 이번 복권은 최소 3등은 당첨된 것 같다. 본 작품집은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어느 시대의 초상',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별 일 없이 산다'는 본인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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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모노레일'(윤여경)

어느 날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한 장소에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잘될 수 있었던, 처음부터 잘될 리 없었던, 오해로 헤어진, 필연적으로 아니었던 그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된다. 지쳐있던 마음은 차차 생기를 찾고, 삶의 핀트를 바로잡는 데까지 이른다. 마지막의 작지만 제법 맘에 드는 반전은 독자 각자가 생각했던 결과에 반사되며 묘한 끝맺음을 남긴다. 이야기가 조금 느슨한 것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 순수한 정서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초속 5cm' 사이 어느 지점에서 빛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날의 꿈'(지현상)

많은 스토리에서 다뤄왔고 심지어 이 단편집에서조차 네 번이나 튀어나온 주제인, 시간 역행과 루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패치워크처럼 엮인 여러 가지 소재와 구성이 이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 그 서늘한 결말이란!


'세이브'(김용준)

두 번째 루프물이다. 시간을 돌리는 기계를 줍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교훈은 뻔하고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렇지만 그 사이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생각으로 파국에 이르는 흐름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몰려만 간다. 사실 타임리프라는 소재를 뺀다면, 평범한 현대인의 운명적인 비극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주제가 '장르성'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곱씹는 재미가 있는 작품.


'어느 시대의 초상'(차태훈)

끝없는 절망 속에 하루하루 지쳐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스케치. 이 작품은 상당히 멋있는 작품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소재를 바탕으로,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려냈다. 재미는 좀 떨어지지만 뭐 '화씨 451'이나 '1984'를 보통의 재미로 읽진 않으니까. 문체도 좋고, 무게감도 상당하다. 최우수상을 탈만한 작품.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조예은)

또 하나의 루프물이자 타임 패러독스 물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소설들을 보면서 장르물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여러 노력 끝에도 결국에는 마주치게 되는 슬픈 결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별 일 없이 산다'(윤태식)

마지막 루프물. 설정은 느슨하고, 이야기는 동어반복적이다. 다만 그 평범한 마무리 속에는 지독하게 절망적인 결말이 숨어있다. 이야기 전반의 부족해보이는 디테일이 역설적으로 이 결말을 더 값지게 만들어준다. 평자들은 아쉽다고 평했지만, 나는 그런 점이 있어서 이 작품이 더 매력적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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