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울렁이는 겨울이다. 초조하게 눈치만 보던 정치인들은 부단한 준비라도 한 것처럼 굴더니, ‘탄핵’ 두 글자를 야심차게 내어놓았다. 분노와 목마름이 넘실대던 광장은 아주 조금은 더 고요해졌지만,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사악함의 증거들은 아직도 뜨거운 우리들의 가슴에 얹히고 쌓인다. 분노, 배신감, 희망, 허탈함이 이리저리 교차하는 지금의 시절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먼 훗날 우리의 세계를 채울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역사를 정의하는 수많은 말이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어는 바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또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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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히믈러의 두뇌'라 불리던 나치의 사악한 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자가 있었다.그는 나치 친위대 내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반대자를 제거하고 유대인들을 멸하고자 했던 악마적인 계획의 총 지휘자였다. 그는 또한 그 유능한 악랄함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나아가 후계자로 점쳐지기도 했던 군사 지도자였다. 그랬던 그가 두 명의 요원과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의 노력에 무너지는 날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 'HHhH'이다.
그 기억을 다루기 위해 저자가 택한 방식은 소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설은 아니다. 허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실에 입각한 것 같지도 않다. 보통의 다큐멘터리, 혹은 팩션과는 달리 저자가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기억과 상념들이 자유스럽게 이곳 저곳에 배열되어 있다. 저자가 그토록 공들이고 있는 역사적 재연은, 사실에 입각해 쓰겠다는 저자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 저자 스스로 밝히듯이 - 사건을 멋지게 재구성해보겠다는 소설적 욕심에 잡혔다 풀려났다 하며 갈 지자 걸음을 걷는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스스로 설명한다. 이 책은 '인프라 소설'이다, 라고.('인프라 소설'이란, 옮긴이에 의하면 '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이다.)
단락은 확고하게 조직되어 있다기보다는 일기장처럼 뚝뚝 끊기고, 글을 이끌어나가야 할 화자는 계속해서 길을 잃는다. 행간에서 드러나는 고민이 아니다. 화자의 입으로 직접, 활자로 자신이 헤매고 있음이 언급된다. 마치 만화주인공이 만화를 읽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이 책의 '화자'도 - 비록 독백 형식이기는 하지만 - 끊임없이 자기 자신 그리고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게 나-우리가 찾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행동이, 이 묘사가, 이런 고민이 왜 있는 것일까, 나-우리는 무엇을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평범한 다큐멘터리나 혹은 역사소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저자는 '하이드리히의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두고 수많은 역사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그럴듯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웬만한 학자보다도 기록물을 꼼꼼히 살핀 이 답게 젠체하면서 이 글을 이끌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탄탄하게 모은 기록을 바탕으로 적당히 기교도 부리고 허세도 부리면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그럴듯한 역사소설을 써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기록'이 아닌, '기억하기'였다.
저자는 온갖 사실로 무겁게 짜여진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들을 보고 상상하고 의심하는데 더 큰 의미를 둔다. 때로는 기록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상념에 빠져보기도 한다. 하이드리히가 탔던 메르세데스는 검은색이었나, 아니면 짙은 초록색이었나? 이러한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사실에 대한 상반된 기록속에서 저자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록'에 병적으로 매달리며 여자친구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는 차츰 '우리가 좇으려는 것은 무엇이었나'라는 저자의 고민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독자들은 그쯤 되면 느낄 것이다. 이 책, 읽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지 지금까지의 한 장 한 장이 촘촘하게 쌓여 머릿속에서 진동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해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짧은 변명 후에 시작되는 마지막 챕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독자들께서도 꼭 한번쯤 생각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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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기억이란 정확하지 않다. 어떤 국회의원이 말했던 것 같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당일, 거의 모든 국민에게 그 날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나도 기억한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본 기울어진 배, 전원 구조되었다는 속보, 한참이 지나서야 나온 오보 소식, 뒤집힌 배를 보았을때의 그 멍한 감정,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를 못하겠던 그 순간들... 그것이 나의 기억이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바람이 유달리 강하게 불던 어느날, 깊은 새벽의 신촌 거리에서 나는 풀려나간 노란색 리본을 주워 다시 줄에 매었었다. 그 날 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을까, 뭘 하려던 참이었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브치크, 쿠비시, 그리고 그 날 그 시절의 이름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 많은 사실들은 세월 속에 잊혀졌고 삭제당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계속해서 '기억'될 것이다.
그 날의 체코가 그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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