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평론, 또는 끄적이기.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이 행위는 기쁨이다. 자신이 보고 읽고 느낀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 나와 이야기의 돈독한 관계를 드러내고, 마지막으로는 이를 이해해주는 또 다른 친구를 만드는 과정이란 제법 즐겁다. 매니아 혹은 오타쿠는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떤 것에 대한 애착,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 열광, 때때로는 애틋한 감정까지도 포함하는 그런 것 말이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의 작가 '닐 게이먼'은, 읽는 이를 그러한 경이감에 빠지게 하는 위대한 이야기꾼 중 한 명이다.
'신들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닐 게이먼',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샌드맨'에 대해 먼저 얘기해두고 싶다. 나는 샌드맨 시리즈를 읽고 닐 게이먼의 광팬이 되었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이야기해두자면, 샌드맨은 내가 읽어 본 그래픽 노블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경이로운 작품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짙게 배어 있는 감동이란 정말이지, 충격적이다. 충격적인 감동이란 말이 정말 잘 어울린다. 닐 게이먼은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동시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그야말로 이야기꾼 세계의 마에스트로이자 후디니면서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틀림없다는 게 나의 견해다. 어떻게 그는 이렇게 위대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다음 책들을 집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닐 게이먼의 신자가 되기 전에 나는 이 책 '신들의 전쟁'을 읽었었다. 2010년 여름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책이 재미 없는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정확히 그 때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렇다고 쳐보자. '신들의 전쟁'이라니! 온갖 히어로물과 전쟁과 파괴와 액션 등등을 사랑하는 20대 초(서양 나이 기준이다)의 필자에게는, 물론 도서관의 더위가 상당히 작용했으리라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격하게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자극적인 제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디서 들은 건 있었는지, 그 때도 닐 게이먼을 알긴 알았다. 책을 집게 만드는 완벽한 조건이 갖춰졌던 것이다. (아, 제목을 '미국의 신들'이라고 직역하기는 어려웠다는 거 이해는 합니다만... 차라리 '이 땅의 신들' 이라든지 하는 고상한 척의 제목은 어땠을지, 편집자님....)
그리고 몇 번의 연장, 기어이 연체에 이르는 활자적인 방황을 했더랬다. 아니, 도대체 전쟁은 누가 하는가, 이 신들은 맨날 입이나 나불거리고 사람들 등쳐먹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없는 것인가. 어떻게 읽긴 다 읽었었고 나름대로 멋진 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미 국민의당의 지지율처럼 허물어진 청년의 기대감이란 이 책에게 과히 좋은 감상을 남길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줍은 과거를 뒤로 하고,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청년은, 중년은 아직 아니고 좀 더 나이 든 청년이 되었다. 매일 업무로 분투하며 야근과의 절절한 연결고리를 온 몸에 감은 채 이제는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한 가운데, 이 책. 슬며시 내게로 다시 왔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니,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었나? 페이지를 재촉하다가, 아직도 이렇게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음을 기뻐하는 그 느낌을 다른 이들도 느꼈으면 좋겠다. 도대체 뭐가 달라졌기에 이랬던 것일까, 배가 조금 더 나와서 이럴 리는 없고... 역시 중요한 차이는 그 사이 몇 년 동안 '샌드맨'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닐까?
샌드맨 타령을 멈추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책 '신들의 전쟁'의 진가를 알고자 한다면 '닐 게이먼'의 스타일에 대해 좀 더 익숙해져야 한다. 닐 게이먼의 소설은 현실로 파고든다. 그는 현실의 가장 구체적인, 디테일한 부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실타래인줄 알고 잡았던 끄트머리는 어느덧 커다란 양탄자로 넓혀져가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이야기 곳곳에 인생의 유한성으로부터 자라난 인간 세계의 알레고리들을 장식으로 수놓는다. 특별할 것 하나 없었던 평범한 이야기들도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가장 아름답거나 혹은 가장 추한 것으로 화하며, 독자들은 슬며시 이 세계가 꾸는 꿈에 같이 잠겨든다.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들에서는 그것이 그림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활자 속에서 이 과정을 그려나가는 것은, 입문자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눈 앞에 두고 다른 책을 읽는 것도 통탄할 일이다. 당신이 각국의 신화와 그 상징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면? 제발, 이 시점에 더이상 구매를 미룰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닐 게이먼의 팬이 될 당신에게 조언이나 좀 풀어주고 글을 마치려 한다.
부디 '묘사'에 집중하라. 환경이 그려내는 이야기의 마법을 믿으라. 인물을 앞세워서 빠르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도 멋지지만, 어떤 고수들은 배경부터가 이미 이야기를 결정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이들은 차분하게, 밥 로스의 그림처럼 캔버스를 색으로 담대하게 채우고 착실하게 디테일을 그려 나간다. 닐 게이먼은 그런 사람이다. 주인공이 던지는 동전을 가만히, 그렇지만 유심히 쳐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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