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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11.28 골든 선(피어스 브라운, 1-2권)
  3. 2016.11.07 영원한 전쟁(조 홀드먼)
  4. 2016.09.25 밑바닥(조 R. 랜스데일)
  5. 2016.08.21 악당(야쿠마루 가쿠)

HHhH(로랑 비네)

생각 2016. 12. 28. 00:26



역사가 울렁이는 겨울이다. 초조하게 눈치만 보던 정치인들은 부단한 준비라도 한 것처럼 굴더니, ‘탄핵’ 두 글자를 야심차게 내어놓았다. 분노와 목마름이 넘실대던 광장은 아주 조금은 더 고요해졌지만,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사악함의 증거들은 아직도 뜨거운 우리들의 가슴에 얹히고 쌓인다. 분노, 배신감, 희망, 허탈함이 이리저리 교차하는 지금의 시절을 나는 어떻게 기억할까? 먼 훗날 우리의 세계를 채울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역사를 정의하는 수많은 말이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어는 바로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또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


HHhH,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

'히믈러의 두뇌'라 불리던 나치의 사악한 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자가 있었다.그는 나치 친위대 내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반대자를 제거하고 유대인들을 멸하고자 했던 악마적인 계획의 총 지휘자였다. 그는 또한 그 유능한 악랄함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나아가 후계자로 점쳐지기도 했던 군사 지도자였다. 그랬던 그가 두 명의 요원과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의 노력에 무너지는 날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 'HHhH'이다.


그 기억을 다루기 위해 저자가 택한 방식은 소설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소설은 아니다. 허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실에 입각한 것 같지도 않다. 보통의 다큐멘터리, 혹은 팩션과는 달리 저자가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기억과 상념들이 자유스럽게 이곳 저곳에 배열되어 있다. 저자가 그토록 공들이고 있는 역사적 재연은, 사실에 입각해 쓰겠다는 저자의 열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 저자 스스로 밝히듯이 - 사건을 멋지게 재구성해보겠다는 소설적 욕심에 잡혔다 풀려났다 하며 갈 지자 걸음을 걷는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스스로 설명한다. 이 책은 '인프라 소설'이다, 라고.('인프라 소설'이란, 옮긴이에 의하면 '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이다.)


단락은 확고하게 조직되어 있다기보다는 일기장처럼 뚝뚝 끊기고, 글을 이끌어나가야 할 화자는 계속해서 길을 잃는다. 행간에서 드러나는 고민이 아니다. 화자의 입으로 직접, 활자로 자신이 헤매고 있음이 언급된다. 마치 만화주인공이 만화를 읽는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이 책의 '화자'도 - 비록 독백 형식이기는 하지만 - 끊임없이 자기 자신 그리고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게 나-우리가 찾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행동이, 이 묘사가, 이런 고민이 왜 있는 것일까, 나-우리는 무엇을 향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평범한 다큐멘터리나 혹은 역사소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저자는 '하이드리히의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두고 수많은 역사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서 그럴듯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웬만한 학자보다도 기록물을 꼼꼼히 살핀 이 답게 젠체하면서 이 글을 이끌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탄탄하게 모은 기록을 바탕으로 적당히 기교도 부리고 허세도 부리면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그럴듯한 역사소설을 써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택한 것은 '기록'이 아닌, '기억하기'였다.


저자는 온갖 사실로 무겁게 짜여진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들을 보고 상상하고 의심하는데 더 큰 의미를 둔다. 때로는 기록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상념에 빠져보기도 한다. 하이드리히가 탔던 메르세데스는 검은색이었나, 아니면 짙은 초록색이었나? 이러한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는 사실에 대한 상반된 기록속에서 저자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록'에 병적으로 매달리며 여자친구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는 차츰 '우리가 좇으려는 것은 무엇이었나'라는 저자의 고민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독자들은 그쯤 되면 느낄 것이다. 이 책, 읽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지 지금까지의 한 장 한 장이 촘촘하게 쌓여 머릿속에서 진동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해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짧은 변명 후에 시작되는 마지막 챕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독자들께서도 꼭 한번쯤 생각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기억이란 정확하지 않다. 어떤 국회의원이 말했던 것 같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당일, 거의 모든 국민에게 그 날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나도 기억한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본 기울어진 배, 전원 구조되었다는 속보, 한참이 지나서야 나온 오보 소식, 뒤집힌 배를 보았을때의 그 멍한 감정,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를 못하겠던 그 순간들... 그것이 나의 기억이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바람이 유달리 강하게 불던 어느날, 깊은 새벽의 신촌 거리에서 나는 풀려나간 노란색 리본을 주워 다시 줄에 매었었다. 그 날 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을까, 뭘 하려던 참이었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브치크, 쿠비시, 그리고 그 날 그 시절의 이름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 많은 사실들은 세월 속에 잊혀졌고 삭제당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계속해서 '기억'될 것이다.


그 날의 체코가 그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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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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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재밌는 책이다. 여러가지 이 글을 시작할 말을 고민했지만, 이 말이야말로 나의 느낌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을 찾지 못했다. 두 권에 달하는 볼륨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온다. 책을 한 챕터씩 읽어 나갈 때마다 다음 챕터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는지.


여러 가지 사회적 담론들을 떠올리게 하던 전편의 계급의식은 일방향적인 영웅담의 흐름 속에 잊혀지는 감이 다소 있다. 레드로서 분노하고 투쟁하였던 지난 편의 아이덴티티는 대로우의 사회적 지위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골드로 치환되어, 어느새 자연스러운 귀족들의 암투 드라마 뒤에 숨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독을 머금은 대로우의 심장은 레드의 그것이다.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레드로서의 자각과 골드로서의 투쟁은 대로우로 하여금 '모두에게 동등한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한다. 이러한 대로우의 고민은 거대한 태풍이 되어 돌아와 드라마의 내적 동력을 채운다.


지난 편이 체제와 소년소녀들의 투쟁을 그림으로써 '헝거 게임' 등의 작품들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편을 읽는 내내 내가 떠올린 서사는 '왕좌의 게임'(얼음과 불의 노래)의 그것이었다. 왕좌의 게임이 우릴 열광하게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내가 제일로 꼽는 것은 전개의 '속도'이다. 익숙한 클리셰와 연결을 위한 서사를 거부하고 수많은 캐릭터들의 목을 쳐 가면서 진행되는 전개 말이다. 이 책에는 그에 비견되는 잔혹함이 있다.


전작의 '올림포스'를 끌고 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로마 문화권으로부터 차용한 인물들의 이름은 일리아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라그나로크에 가깝다. 유사 신으로서 군림했던 골드들은 대로우를 둘러싼 음모와 전쟁 속에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쓰러져 참담하게 죽어간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골드들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인가? '라그날'으로 대표되는 하층 계급은 과연 눈을 뜰 수 있을 것인가? 틈틈이 뿌려둔 사회적 담론의 맹아들로 꼼꼼하게 빈 곳을 메꿔가며, 음모와 갈등을 연료삼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서사에서 눈을 멈추기는 정말로 어렵다.


'레드 라이징'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야말로 올 연말 가장 뜨거운 책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레드 라이징'부터 시작하는 걸 권한다. 현시대 최고의 스페이스 오페라를 접할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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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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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6, 7년 전쯤에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을 읽었다. 그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진중문고, 즉 국방부 추천도서로 부대에 들어와 있었다. 결코 국방부의 정서와는 맞지 않을 듯 한 그 책이 추천도서에 낀 것은 담당자의 실수였을까 아니면 재치였을까.


어찌되었든 나는 '노인의 전쟁'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적당히 가볍고, 꽤나 재밌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책을 최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두 권의 책 때문에 눈이 많이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두 책은 '스타쉽 트루퍼즈'와 '영원한 전쟁'이었다.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재출간된 '영원한 전쟁'은 존 스칼지의 서문을 담고 있다. 재미있게도 존 스칼지는 '노인의 전쟁'을 쓴 뒤 한참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끊임없이 오마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을 존 스칼지의 안타까움이 이해는 되지만, 그만큼 이 책은 훌륭하다. '노인의 전쟁'이 슬며시 내비치는 데 그쳤던 반전 의식은, '영원한 전쟁'의 주제로서 수준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이 최고의 '反戰 SF'로 불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많은 매력이 있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군'의 생리를 그려낸 특유의 리얼리티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몸소 체험해 보았겠지만, 군이라는 것은 정말로 기괴한 조직이다. 얼핏 보기에는 국민을 지킨다라는 심플하고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목적의 밑바닥에는 개개인의 욕심과 나태함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 '국방'을 담보삼아, 이해할 수도 없고 용인되어서도 안되는 수많은 부조리가 지배하는 세상 - 그곳이 바로 '군'이다.


군대란 이 대한민국에서 유난히도 참담한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디나 군대라는 것은 그 특유의 속성을 저버리지를 못하나 보다. 홀드먼이 묘사한 미래의 군대도 내가 겪었던 그 장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찮은 성과와 생명 사이에서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저울질에, 비정상적으로 뒤틀려있는 '역할'에 대한 강박감 등등 미래의 전장과 나의 경험을 연결해 주는 것은 너무나도 많다. 베트남에서 실제로 끔찍한 전쟁을 경험하며 중상을 입고 제대한 조 홀드먼이 나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깊은 고찰을 했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리라.


'영원한 전쟁'의 특별한 존재감은 바로 그 리얼리티, 끈적끈적하게 내 정서를 자극하는 몰입감으로부터 태어난다. 우리는 자신이 미래의 군인이 되었다는 착각 속에 짜릿한 전투의 스릴 속에 끌려들어가기도 하고, 구토감을 자극하는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가며 이야기 속에서 짜여지고 있던 알레고리의 큰 그림을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랄맞은'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여담.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07년도 여름, 입대를 약 8개월 쯤 앞둔 시점이었다. 두 번을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기는 했지만, 지금 이 책은 그때와는 다른 유난히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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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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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맛이 있는 책이다. 이야기는 충분히 긴데 따라가는 데 지루함이 없다. 중간중간 끊어 읽는데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잘 쓰는 작가의 잘 쓰여진 글이다.


이 소설 '밑바닥'은 1930년대의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다. 대공황의 경제적 침체가 서서히 닥쳐오고 있고, 지난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유령처럼 문득문득 떠오르는 배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사스의 작은 시골은 그들 나름대로의 느긋한 정서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틈이 사건이 진행되며 조금씩 드러난다.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남부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는 텍사스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여전히 흑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을 품고 있다. 온갖 범죄의 가능성을 흑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이 사회의 온갖 부정의 씨앗을 흑인에게서 찾는 풍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부업으로 마을의 경관을 맡으며, 이러한 세태에 저항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사건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하고, 쉬운 결론 대신 언제나 이유와 단서를 찾음으로서 정의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수사는 항상 한계에 부딪히고,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찾기는 켜녕 강요된 거짓의 파도에 떠밀리며 그의 마음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좇으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앞서 중간중간 끊어 읽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다라는 말을 했었다. 이는 이 소설 전역에 녹아있는 착실한 디테일 덕분이다. 배경은 캐릭터를 통해 보증되고, 캐릭터들은 주인공이 내용 중간에 겪기도 하고 회상하기도 하는 에피소드들 속에서 구체적이고 특색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화자가 소년이자 노인이라는 특성은 이 이야기를 더욱 디테일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어린이로서 느꼈던 단순한 상황과, 나이 지긋한 노인으로서 되짚어보는 입체적인 상황의 해석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중간중간에 치고들어오는 초자연적인 공포에 대한 묘사도 멋지다. 물론 실제로 유령이나 악마는 없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그려지는 두려운 체험은 이 소설의 전역에 광기와 절대악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치 잭 더 리퍼와 같은 광란의 살인범과 염소인간의 존재는 범인을 따라가는 독자의 마음에 계속해서 공포를 불어넣는다. 


이렇듯 좋은 스릴러 소설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소설의 매력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었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그렇게 우리를 스쳐 지나간 이들을 회상하다 보면, 그리고 주인공 노인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필자가 이 책을 덮으면서 느꼈던 울컥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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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야쿠마루 가쿠)

생각 2016. 8. 21. 23:42




우린 흔히 누군가를 악하다, 악인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정의내린다. 그러나 다시 한번 고민해보자. 우리가 말하는 악당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이 책 '악당'이 던지는 질문이다. '악'에 대한 재미없는 고민이나,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다더라 식으로 넘기는 대책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관점에 따라 그 경중의 차이는 둘 수 있겠으나 이 책의 악당들은 '진짜 악당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당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악당' 의 이야기는 참 간단하다. 사설탐정 '사에키 슈이치'가 9개의 에피소드를 겪으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되짚어본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에서의 '사설탐정 사무소'란 우리 말로 바꾸면 흥신소다. 이들의 주된 일 또한 누군가의 뒤를 캐는 일이다. 뒤를 캔다고 하면 불륜을 캐고 상대의 신원을 캐고 사라진 이들을 찾는 그런 일들이 보통이겠지만, 여기서 주인공이 맡게 되는 일은 '범죄자들의 근황 캐기'다. 주 의뢰자는 당연히도 피해자다.


피해자는 범죄자를 절대 잊지 못한다. 피해자는 반드시 범죄자보다도 큰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절대 사라질 리 없는 증오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자비 그 중간에서 허우적대며 파멸해가는 것이 피해자의 삶이다. 삶의 끄트머리로 밀려날 즈음, 복수든 자비든 어떤 한 쪽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이 주인공의 생계 수단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또한 피해자이다. 결국 주인공 또한 그들과 같이 어떤 '대답'을 찾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독자의 감정이입에 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다면 7개의 에피소드가 있고 그만큼의 범죄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독자가 만나는 가장 충격적인 에피소드는 프롤로그에 있다. 여기서 이 책의 핵심 질문, '만일 나라면?'이 시작된다. 우리는 사에키가 되고, 많은 피해자들의 삶 속에서 사에키와 함께 '대답'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일종의 관찰 기록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TV, 인터넷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새로운 범죄 뉴스들이 보도된다. 이 책에서는 그 뉴스들을 한 명 한 명의 특정인들로 붙잡아 재연해낸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사실 굉장히 어렵다. 유형화된 뉴스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인간'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에키가 뒷조사를 통해 여러 범죄자들의 삶을 스케치하는 동안, 결국 우리는 '악당'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악당들'. 그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과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일고여덟 번의 에피소드에서 만나고 나면 에필로그에서 필자와 같은 울컥함을 느끼리라 믿는다.



Posted by badh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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